우계성혼 소개생애와 사상
생애와 사상

 우계 성혼 선생은 어떤 분인가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은 1535(종종 30) 225일에 태어나 1598(선조 31) 66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4세였다. 

사숙공 성세순(成世純)의 손자이며 청송(聽松) 선생의 아들로 자는 호원이며 호는 묵암 또는 우계라 불렸고 모부인(母夫人)은 파평 윤씨이다.

선생께서는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문인이었던 휴암 백인걸선생에게서 공부하였으나 대부분의 공부는 가학(家學)을 이어받았다. 선생이 공부함에 있어 성()과 경()을 내세워 대의를 깨우치고 문도(聞道)하는 자세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생원 진사의 양장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가학의 영향으로 과거에는 뜻이 없어 복시를 보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셨다.

선생은 항상 정암과 퇴계 두 분 선생을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그 까닭은 도의와 의리를 내세워 정기(正氣)를 바로 펴 나아간 정암선생에게서 부친인 청송선생이 정학(正學)을 배워 가학을 일으켜 세운 영향 때문이었으며 퇴계 선생은 유교윤상(儒敎倫常)에 어긋나지 않는 직유정사(直儒正士)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율곡 이이 선생과 도의지교를 맺어 성리학을 논하며 파주땅에 사시면서 도를 펴 나아갔으니 당대의 명망이 모두 선생께 몰려 세상에서는 우계선생이라 존경하여 부르기도 하였다.

뒷날 좌의정이었던 김상용이 지은 선생의 신도비문에는율곡 이문성공(李文成公)도 도학(道學)이 우뚝하다고 자임하여 선생과 서로 강명(講明)하였으나 선생이 더욱 조예가 깊었으며 한 때 선비들이 선생에게로 쏠려 모두 우계선생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에 율곡선생의 제자였던 조헌, 한교, 황신, 이귀, 정엽 등이 선생의 문인이 되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조선성리학의 정통을 승계한 큰 학자임을 알 수 있는 일이고 선생의 도학이 얼마나 높고 뚜렷했는가를 알만하다. 선생에 대한 기록은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인조실록 등에 자세히 나오는데 선조가 즉위한지 1년이 채 못 되어 인재를 얻기 위하여 유일을 천거하도록 각도에 명했을 때 경기관찰사 윤헌은 선생을 천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일이라고 할 만한 선비를 지금 세상에서는 얻기 어렵습니다. ()은 성수침의 아들로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 받아 행실이 순수하고 잡되지 아니하며 배움에 나아가되 물러서지 아니하여 향인(鄕人)의 칭송이 대단합니다. 그러므로 파주목사(牧使)의 보고에 따라 그를 추천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선생의 친구였던 율곡이 말리면서혼은 학자라서 벼슬해서 이름을 얻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학문을 크게 이루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렸으나 윤현은 끝내 듣지 않고 추천하였다.

이는 우계선생의 뜻이 벼슬보다 학문에 더 있었음을 율곡선생이 알았기 때문이었다. 유일로 추천되어 두 번 씩이나 참봉을 제수 받았고 적성현감에 임명받고도 사은(謝恩)만 하고 취임하지 않은 것을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조는 우계선생이 벼슬을 뿌리치면 그럴수록 더 극진히 예우하여 어쩔 수 없이 벼슬자리를 맡게 하기도 하였다.

선생께서 몸이 건강하시지 못하였기 때문에 벼슬을 사양한다는 말씀을 듣고 선조는 약물을 보냈으며 장령(掌令)에 임명하고서는 몸이 불편하면 수레를 타고 서울로 들어오도록 특전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선생은 도가 행하여지지 않을 것 같으면 언제고 벼슬자리에서 물러났는데 율곡선생이 이조판서에 있을 때 이조참의에 잠시 계셨으나 율곡선생이 별세하자 그 자리를 내놓고 파주로 돌아 오셨다.

사헌부장령, 병조참지, 이조참의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쳐 선조 16, 이조참판에 임명하였으나 연속 5차례의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선조의 애절한 부름을 받고 잠시 응하였다가 곧 사임한 사실이 선조수정실록(선조 17년 갑신 정월조)에 기록되어 있다.

율곡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어 연일 상소문을 올려 파주로 돌아 갈 것을 청했고 해임되어 귀향한 후에는 소명(召命)이 없다가 임진왜란때 세자의 부름을 받고 우참찬에 오르고 곧 좌참찬이 되셨다.

선조수정실록(17, 16년 계미 10월조)에 나타나 있는 사실을 보면 임금의 신임이 두터워 벼슬을 뿌리쳐도 계옥(啟沃)을 구실삼아 선생을 조정에 붙잡아 두는 예우가 있자 시기하는 사람이 늘었고 당쟁이 만연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더욱 거세였다.

임란때 임금을 호종하지 못한 까닭은 선조가 황급하게 임진강을 건너간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며 알았을 때는 이미 적군이 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선생은 적군을 피하여 광해군이 머물고 있는 이천으로 가서 여러 가지 군무를 아뢰었다.

검찰사로 임명받았으나 광해군이 성천으로 갔기 때문에 즉시 의주행재소로 달려갔다.

이때 참찬으로 임명되었다가 대사헌으로 직책이 변경되었다. 선생은 상소문을 올려 장수의 선출, 군사의 훈련, 군량미의 취합에 대하나 대책을 선조에게 상세히 아뢰고 왜적의 칩임을 천수나 외환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국사를 잘못 처리한 신하를 처벌하고 백성들의 개과천선할 것을 알리며 임금의 존호(尊號)를 삭제하고 크게 분발하여 자책한 뒤 정직하나 인사를 정부에 등용하여 인심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아뢰었다.

선생의 사상은 이기일발설로 요약되며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완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여 퇴고우율 철학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선생이 율곡과의 토론은 인심도심설이었는데 율곡은 이기의 不雜(決是二物)不離(不可分開) 를 내세워 이발을 부인하고 기발만을 인정하여 사칠팔도를 기발이승일도설로 해명하였는데 선생은 이승기이행(理乘氣而行)으로서 이기일발설을 주장하셨다.

선생은 주자의 인심도심설과 율곡의 일도설 그리고 고봉 기대승의 이기공발설과 퇴계의 이기양발설을 종합·절충하여 독특한 성정설을 수립하였다.

선생의 성리학은 천리돈확(踐履敦確)한 실천학으로 발전되고 주리·주기의 분개의 가능성과 호발설의 논증을 통해서 주리파와 주기파 외에 절충파로 학맥을 이었고 이들은 모두 서인에 속해 있었으나 송시열과 분립하여 윤극, 박세채 등, 소론을 형성하게 되었고 김상용이래로 김창협, 김창흡 등에게 파급되어 화서 이항노로 이어졌다.

선생의 도학정신과 천복돈확사상은 한훤당 김굉필과 조광조, 부친이었던 청송으로부터 이어받았고 조선의 도학연원의 정통으로 선생의 실사구시의 학풍은 재야사림의 선비정신으로 그 주류를 이루었으며 효제성경(孝悌誠敬)을 근본으로 한 선생의 사상은 강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유교의 본산이 되었다.

선조수정실록(31년 무술 6월조)에 보면성혼은 타고난 성품이 높고 덕성과 기량이 일찍 성숙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가정의 가르침을 잘 지키고 또 일찍부터 이황을 존모하여 사숙하였으며 그 학문은 고정(주자)을 준칙으로 삼아서 강명천이(講明踐履)가 실효를 거둘 수 있어서 본원에 더욱 상응할 수 있었다.

이이와 함께 사단칠정과 이기선후의 학설을 논하며 오고간 것이 수천만언이나 되었는데 유선들이 아직 생각하지 못한 것도 많았다. 이이가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견해의 도달한 바로 말하면 내가 약간 낫다고 할 것이나 조수(操守)와 실천이 돈독하고 굳기로는 내가 미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학행으로 천거되어 여러 번 소명을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아서 왕의 믿음이 더욱 깊어서 그를 부름이 그치지 않았으나 성혼은 애써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간혹 나아간다 해도 오래 머무를 뜻이 없이 벼슬에 있었던 날짜는 모두 합해도 1년이 되지 못했다고 사관은 기록하고 있다.

선생은 효성이 지극해서 청송선생께서 병이 들었을 때 다리 살을 베어 약에 넣어 올려 생명을 연장시켰으며 상을 당한 뒤 3년간을 정성껏 시묘살이를 했다. 언행과 학문은 후학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세상 사람들은 도덕군자라고 했다.

부인은 고령신씨로 군수 여량의 딸이었고 22녀를 두었는데 장남 문영은 일찍 죽고 차남 문준은 현감이며 장녀는 남궁 선에게 차녀는 대사간 윤황에게 출가하였다.

1623(인조 11)에 좌의정으로 증직되고 문간공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 16 81(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행장은 문충공 이정귀가 지었고 신도비는 문정공 김상헌이 묘표음기는 문경공 김집이 지었고 글씨는 외손인 윤선거가 썼고 머리 글씨의 전서는 김상용이 썼다.

1767(영조 43), 510일 선생의 사우(祠宇)를 장동 구택으로 옮겨 모실 때 영조 임금께서 직접 다음과 같은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상 치발문(영조 어제 20구) 일부 

 아! 훌륭한 경은

 嗚呼惟卿

 창녕의 거족이었네

 昌寧盛族

 국초(조선초기)로 부터

 粵自國初

 세덕이 이미 드러났네

 已著世德

 청송선생의 아드님으로

 聽松之者